≪레이빙≫ 옮긴이 후기
10여년 전에 처음 클럽에 갔고 그 후로 한동안 매주 클럽에 다녔습니다. 당연하게도 늘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제 그만 와야지’ 하고 생각한 날도 많았습니다. 『레이빙』의 저자 매켄지 워크가 ‘좋은 날'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날이 드물게 있었습니다. 음악, 그곳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제 움직임이 잘 맞아떨어지는 날에는 행복했습니다. 거의 매주 클럽에 가서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사람들을 사귀었습니다. 습관처럼요. 그러다 한동안 클럽에 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가끔 클럽에 갔지만 예전처럼 자주 가진 못했습니다. 새벽까지 노는 일이 무리가 되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 몇 년 전 친구와 이태원에 있는 한 테크노 클럽에 갔습니다. 그날도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술을 한잔하고 찾아간 클럽에서 저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어떤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켄지 워크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해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친구도 그날 그 공간에서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클럽 옆 햄버거 가게 앞에 앉아 이게 대체 무슨 경험인 건지 한참 탐구했습니다. 마치 사우나에 다녀온 것처럼 몸이 몹시 가볍고 개운했습니다.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 혼자 음악에 몰두하고 춤을 췄을 뿐인데 낯설고 기이한 상태를 경험했고 행복하고 가뿐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별한 경험을 한 뒤에 저는 레이브에 관한 책을 만들고 싶어 관련 도서 여러 권을 검토했고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이 책이 레이브에 관한 책 중에 가장 뛰어나거나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가 테크노와 관련해서 가장 읽고 싶었던 종류의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테크노나 음악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쓴 테크노에 관한 책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는 테크노 클럽에서 느끼는 행복, 기쁨, 우울, 권태, 타인을 향한 욕망, 관심받고 싶은 마음, 미약하거나 강렬한 일시적 상태들을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이고요. 테크노의 시작점에 있었던 흑인들에 관한 이야기와 흑인 연구자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뉴욕에 사는 백인 트랜스섹슈얼 연구자인 매켄지 워크의 경험과 저의 경험은 때때로 아주 멀게 느껴졌지만 이입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늘 욕망하고 대체로 실패한다는 부분에서 특히 그랬습니다. 저는 이 책을 한국어로 옮겨서 다른 사람들, 특히 테크노와 퀴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번역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인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매켄지 워크의 문장은 복잡하거나 함축적이었는데 그 안에는 제가 아는 맥락과 모르는 맥락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최대한 알아내고자 애썼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가 충분히 옮기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 언어화하기 어려운 느낌, 감정, 기분을 포착해 이를 개념화하고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 시도한 글이기에 아름다운 동시에 난해한 문장이 많았습니다. 단어를 열심히 고르고 골랐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 책의 편집을 맡아준 이진화 편집자가 없었더라면 출간 과정이 훨씬 더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실한 연구자이기도 한 이진화 편집자는 이 책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참고문헌을 알려주었고, 원문의 섬세한 결을 살릴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정말 든든했고 덕분에 덜 외로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레이빙』의 번역 판권 계약을 고민하던 시기에 응원을 힘껏 보내준 화이트 리버 출판사 운영자이자 디자이너인 남선미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고, 이 책을 정말 읽고 싶다고 계속 얘기해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번역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빙』 번역 원고를 처음 읽어준 레이버 친구들 김동현, 강상헌에게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준 의견이 원고 수정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 앞에 두 사람과 함께 있어서 덜 무서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초보 출판인인 저는 아직 책을 만드는 단계 하나하나가 어렵습니다. 확신이 없어 괴로울 때마다 마음과 몸의 안식처가 되어준 리시올/플레이타임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보태준 의견 덕분에 무사히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던 중에 저는 류한길 음악가의 강의를 수강했습니다. 『레이빙』에 나오는 음악 용어와 맥락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수강한 강의였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소리에 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책의 맥락을 깊이 이해할 저자라 생각하여 해제 작성을 부탁드렸습니다. 류한길님의 책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를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흔쾌히 『레이빙』의 해제를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국의 레이브 문화와 역사의 작은 부분을 해제를 통해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마지막으로 추천사로 함께 해준 퀴어활동가 나영정, 번역가이자 작가 문호영, 트랜스패런트 기획자이자 뮤지션인 정글, 뮤지션 NET GALA님께 감사합니다.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너무나 궁금했던 분들께 추천사를 부탁드렸고 아름다운 추천사로 이 책의 한 부분을 든든히 채워주었습니다. 나영정 활동가가 소속된 연구모임POP의 『켐섹스(Chemsex)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읽으며 약물과 약물 사용자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관련 연구와 활동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응원을 보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더 나은 레이브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악의와 혐오가 넘치는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퀴어 친구들에게도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1인출판사이지만 이번 책도 여럿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 책이 잠시나마 즐겁게 도피할 수 있는 지하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